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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다시, 관계의 집으로

다시, 관계의 집으로
  • 저자최우용
  • 출판사궁리출판
  • 출판년2014-04-08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5-05-20)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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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른 눈의 이방인이 제주에 만든 기이한 시멘트집,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상엿집, 도시에 만개해 있는 노출 콘크리트 집들과 서글픈 아파트의 역사, 기만적인 랜드마크의 허구까지. 관계 맺기에 집중하며 인간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건축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에는 건축이 세상과 소통하는 다섯 가지 시선이 등장한다. 몽상가의 눈, 관찰자의 눈, 소설가의 눈, 여행객의 눈, 건축가의 눈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다섯 가지 시선은 큰 틀에서 모두 같은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속에 놓여 있는 집들과 그 집들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다만 그 관계를 어떤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장소 그리고 건축은 물리적인 땅과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장소와 건축은 그 물리적인 실체를 통해 있었던 일들과 관계된 일들 또는 지나간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고향에서, 또는 옛집에서 유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장소와 건축이 적층시키고 있는 시간의 층위가 두꺼울수록 그 장소와 건축이 갖고 있는 기억의 소구력은 커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와 건축을 찾아가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는 한다. 지역과 기후가 다르고 인종과 문화가 다르며,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아주 다양하게 전개된 관계의 집들을 이 책에서 살펴보면서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인 집과 공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 제주에 만든 기이한 시멘트집,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상엿집,

    도시에 만개해 있는 노출 콘크리트 집들과

    서글픈 아파트의 역사와 기만적인 랜드마크의 허구까지.



    관계 맺기에 집중하며 인간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건축 이야기!




    오늘날 우리 주변의 집들은 대부분 매끈하고 깨끗하다. 오래된 집들도 부수거나 고쳐서 매끈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추세이며, 최근에 지어지는 집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건축에는 이 매끈함과 깨끗함에 가려져 잘 안 보이는 부분들이 많이 숨어 있다. 일상의 흔하고 흔한 대상인 건축, 매끄러운 덩어리와 외관에 가려져 있는 건축의 이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다시, 관계의 집으로』를 쓴 최우용은 건축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일산 밤가시초가, 제주의 테쉬폰 주택, 경산 상엿집,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을 둘러보며 주로 잊혀져가거나 사라져가거나 또는 구석과 변방에 놓인 건축물들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에 주목해왔다. ‘관계’는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의 연결 방식을 말한다. 이 세상에 오롯이 홀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관계의 그물망에 촘촘하게 걸려 있다. 건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오늘의 어떤 집들은 자못 오만하거나 혹은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다. 스스로 홀로 굳건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 또는 착각 말이다. 그런 집들은 집이 놓일 동네의 맥락을 살피지 않거나 환경을 장식품쯤으로 여기며 삶의 활동 근간인 에너지 과용에 무감하고 그래서 자꾸만 우뚝해지고 비대해지며 자폐적으로 변해간다.



    우뚝함을 미덕으로 삼으며 우리 삶의 물리적 조건을 장악한 존재의 집들은 자기 완결적이기 위해 주변과의 관계를 끊어내고 그 존재의 안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관계를 거세당한 이 자기 완결은 대부분 헛것이었다. 저 우뚝하고 거대한 건축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으며, 생산성의 논리 그리고 근대를 향한 지독한 짝사랑과 관성적 설계방법론에 이끌어진 공간은 관계를 절단당한 채 자폐적으로 닫혀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는 그 스스로 랜드마크라고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여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줘야 랜드마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랜드마크는 만든 사람의 의지가 개입된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난 후 사람들의 정서에 의해 걸러지고 시간의 검증을 통해 상징적으로 대표되는 의미를 부여 받으면 그때 랜드마크가 되는 것이다. 파리의 에펠탑도,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도, 서울의 남대문도 두터운 시간의 층위를 갖고 있다. 랜드마크는 추상적인 두께와 시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명확하고도 단순한 이 사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다. 랜드마크를 조급스럽게 갈망하는 이들은 주로 가시적 특이성에 달려든다. 눈에 보이면서 특이하면 랜드마크라고 하는 것인데, 그래서 그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고려의 대상이 되기에는 부족하며 시간의 누적을 견딜 만한 인내심은 부족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랜드마크에 집착하는 이들의 행동은 다급하고 또 경솔하며 무례하다.

    -「랜드마크를 끝도 없이 만들어내는 도시」, 186∼187쪽



    오히려 중심이 아닌 주변과 변방 또는 사라져가거나 잊혀져가는 집들은 오히려 오늘의 어떤 집들처럼 오만하거나 착각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집들은 만들어지는 과정에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과의 관계 맺기에 집중해서 지어졌기 때문이다. 관계 맺기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집들은 인간 삶의 깊이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고, 미래세대에 대한 구속력을 줄일 수가 있었다.



    제주의 테쉬폰 주택에는 아치가 되고 싶은 벽돌의 의지에 앞선 것이 있었다. 그것은 궁핍 또는 결핍이었다. 가난한 제주 중산간에 넘치는 재료는 억새였으며 벽돌은 비싼 재료였다. 벽안의 신부에게는 아치가 되고 싶은 벽돌의 의지보다 제주의 가난한 현실이 당면한 문제였을 것이다. 이것이 테쉬폰 주택의 아치가 벽돌이 아닌 시멘트로 만들어진 이유일 것이다.

    재료를 존중하는 방식은 각각이다. 어떤 것이 어떤 방식보다 낫고 못한 것이 아니다. 다만, 물성을 아는 현명함과 물성을 모르고 또 무시하는 무지가 다를 뿐이다. 아치에 작용하는 수직과 수평의 힘은 아치의 곡선을 따라 유연한 벡터로 변환되어 땅으로 내리꽂히며 지반으로 스며들어 소멸한다. 조적의 아치와 시멘트의 아치는 그 꼴 지워진 방식은 다르나 힘의 거동은 동일하다.

    -「멸절한 건축의 화석, 테쉬폰 주택」, 52∼53쪽





    이제, 우리는 다시 관계의 집을 이야기할 때이다!



    이 책에는 건축이 세상과 소통하는 다섯 가지 시선이 등장한다. 몽상가의 눈, 관찰자의 눈, 소설가의 눈, 여행객의 눈, 건축가의 눈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다섯 가지 시선은 큰 틀에서 모두 같은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속에 놓여 있는 집들과 그 집들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같은 것이다. 다만 그 관계를 어떤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장소 그리고 건축은 물리적인 땅과 공간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장소와 건축은 그 물리적인 실체를 통해 있었던 일들과 관계된 일들 또는 지나간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고향에서, 또는 옛집에서 유년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장소와 건축이 적층시키고 있는 시간의 층위가 두꺼울수록 그 장소와 건축이 갖고 있는 기억의 소구력은 커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의미 있는 장소와 건축을 찾아가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고는 한다. 지역과 기후가 다르고 인종과 문화가 다르며,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아주 다양하게 전개된 관계의 집들을 이 책에서 살펴보면서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인 집과 공간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만석동의 판잣집에는 잉여와 과장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모진 가난의 최접점에서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 값싼 재료들을 그러모아 자신들이 가진 최선의 기술을 동원하여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먹어야 살 수 있는 밥처럼 어쩔 수 없이 잠을 자야 하는 집일뿐이었다. 그래서 용적률과 현대화, 개발이라는 용어가 만들어낸 집들은 오히려 이 순전한 판잣집 앞에서 초라해진다. 사야 하는 집과 살아야 하는 집에 투영되는 살림살이에 대한 간절한 의지에서 전자는 후자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괭이부리말의 판잣집들은 겨우 숨을 내쉴 정도의 공간에서도 서로의 존재를 끌어안으며 적응과 순응 그리고 양보가 어떤 것인지를 그 존재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괭이부리말에 스며든 집, 기찻길 옆 공부방」, 178∼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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